JANGUN


마음의 진화
: Kinds of Minds

저자 : 대니얼 데닛
이희재 옮김


목차

옮긴이의 말
1장 마음의 종류
2장 지향계란 무엇인가?
3장 몸과 그 마음
4장 생산과 검증의 탑
5장 생각의 탄생
6장 우리 마음과 다른 마음

들어가는 글

저자는 인간이 아닌 생물도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마음과는 성격이 다르며, 인공지능은 원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동물은 사람과 의사 소통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근원적으로 동물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결론이다. 또 하나는 마음을 가진 존재와 마음이 없는 존재를 명확히 가르는 구분선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다.
우리의 마음은 다채로운 가닥으로 짜여지고 다양한 무늬로 수놓은 복잡한 천이다. 이러한 가닥 중에는 생명만큼이나 오래된 것이 있는가 하면 오늘날의 과학 기술처럼 새로운 것도 있다.

1장 마음의 종류

나는 마음이 있을까?
나, 너, 우리 = 마음을 가진 존재
말한다는 것과 마음이 있다는 것
말 못하는 존재도 마음이 있을까?


2장 지향계란 무엇인가?

우리의 조상은 로봇이다 : 우리는 자기 복제 로봇의 직계 자손이다. 하나하나의 세포(제한된 수의 업무를 수행하는 작은 행위자)는 바이러스처럼 무심하게 움직인다. 이런 멍청한 난쟁이가 대거 집결하면 거기서 정말로 마음이 있고 진짜 의식이 있는 사람이 나오는 것일까? 현대 과학에서 다른 식의 설명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로봇의 후예라고 해서 우리가 곧 로봇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가 물고기의 직계 자손이지만 물고기는 아니며 세균의 직계 자손이지만 세균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튼 만일 우리 안에 신비에 쌓인 잉여 요소(이원론자와 생기론자는 바로 이런 것을 믿는다)가 있다면 모를까, 우리는 로봇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향적 자세 : 지향적 자세는 어떤 대상(사람일 수도 있고 동물 또는 인공물일 수도 있다)의 행위를 그 대상이 스스로의 ‘믿음’과 ‘욕구’를 ‘고려’하여 ‘행위’를 ‘선택’하는 합리적 행위자라는 전제 아래 이해하는 전략이다. 지향적 자세는 우리가 서로를 상대할 때 흔히 취하는 자세나 관점이다. 다른 존재를 바라볼 때 지향적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그 존재를 의인화하는 일과 비슷하다. 지향적 자세의 기본 전략은 눈앞에 있는 존재의 행동이나 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해(말하자면 설명하기 위해) 그 존재를 행위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물리적 자세는 물리학의 통상적인 연구 방법이다. 물리 법칙과 눈앞에 놓인 사물의 물리적 구성을 이미 아는 지식을 토대로 헤아린다. 손에서 벗어난 돌맹이가 땅바닥에 떨어지리라고 예측할 때 나는 물리적 자세에 기대는 것이다.
구조적 자세는 우리가 늘 애용하는 지름길이다. 누군가 나에게 새로 나온 디지털 자명종을 선물했다고 하자. 내부 구조와 겉모양은 아주 생소하지만 겉에 달린 단추들과 작동하는 것을 잠깐 훑어보면 이 단추를 이렇게 누르면 몇 시간 뒤에 자명종이 커다란 소리를 낼 거라고 자신할 수 있다. 그저 이것이 특정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으며 그 구조와 설계에 알맞게 움직일 것이라고 가정할 따름이다. 구조적 자세에 바탕을 둔 예측은 물리적 자세에 기초를 둔 예측보다 위험하다. 고장 나지 않을 것이라는 또 하나의 가정을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향적 자세를 자명종에 적용해 보자. 이 자명종은 나의 하인인 셈이다. 만일 자명종에게 특정 시각을 주지시킴으로써 나를 깨우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나는 그 시각이 되었을 때 약속된 행동을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는 자명종의 내적 능력을 신뢰하는 셈이다.
지향계(intentional system)는 그 행동이 지향적 자세에 의해서 예측되고 규명되는 모든 존재를 일컫는다. 자기 복제하는 거대 분자, 자동온도 조절장치, 아메바, 식물, 쥐, 박쥐, 사람, 체스를 두는 컴퓨터는 흥미도에서는 차이가 많을 지 모르지만 하나같이 지향계다.
철학에서 말하는 지향성(intentionality)은 그냥 겨냥(aboutness)이다. 자기 아닌 다른 존재를 어떤 식이든 겨냥하는 행동을 할 때 그 존재는 지향성을 드러낸다. 지향성을 드러내는 존재는 다른 존재에 대한 표상(representation, 지각에 의하여 의식에 나타나는 외부 대상의 이미지)을 지닌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식의 표현은 설명도 제래도 못할 뿐 아니라 문제점도 많다. 자물쇠는 자물쇠를 여는 열쇠의 표상을 지니는가? 자물쇠와 열쇠는 가장 원초적인 지향성을 드러낸다.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려면 생각하는 방식(있을 수 있는 수많은 방식의 하나)이 있어야 한다. 모든 지향계는 그 지향계의 ‘생각’이 무엇이든 그런 특수한 방식에 의존하여 지각하고 탐색하고 식별하고 경계하고 회상하고 생각한다. 어떤 지향계가 자신의 상황에서 실제로 거두는 ‘성공’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지향계가 대상을 구별하는 능력에 의존하는 방식을, 다시 말해서 대상을 ‘겨눈 생각’을 정확히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논리학에는 지향성을 뜻하는 intentionality와 비슷한 intensionality, 곧 내포성이라는 단어가 있다. 내포성은 언어의 고유한 특성이다. 의미를 가진 모든 술어는 그 술어가 가리키는 사물 또는 사물들의 집합인 외연과, 사물 또는 사물들의 집합이 선택되거나 결정되는 특별한 방식인 내포를 지닌다. ‘첼시어 클린턴의 아빠’와 ‘1995년 미국 대통령’은 똑같이 빌 클린턴을 가리키며 똑 같은 외연을 갖지만 이 동일한 존재를 다른 방식으로 겨냥하므로 내포는 다르다. ‘등변 삼각형’이라는 술어는 ‘등각 삼각형’이라는 술어와 정확히 같은 대상 집합을 추려내므로 이 두 술어는 똑 같은 외연을 갖지만 동일한 대상을 뜻하지는 않는다. 내포는 외연과 다르며 어디까지나 의미를 뜻한다. 지향성도 결국 의미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을까?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지향적 자세를 다른 존재에 들이대면서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데 쓰는 자기만의 남다른 수법을 고집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틀을 다른 존재에게 강요하는 오만한 행동인 셈이다. 그러다 보면 지향계를 실제보다 훨씬 명료하고, 내용도 실제보다 훨씬 선명하고 정교하고, 짜임새도 실제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잘못 아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본래적 지향성과 파생적 지향성 – 본래적 지향성은 우리가 지닌 생각, 믿음, 욕망, 의도의 겨냥이다. 이것은 말, 문장, 책, 지도, 그림, 컴퓨터 프로그램 같은 인공물처럼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고 파생적 성격을 가진 겨냥의 명백한 원천이다. 인공 표상물의 파생적 지향성은 그 창조의 밑바닥에 깔린 참다운 본재적 지향성 위에 얹혀 있다.
사고 언어 가설
관념 그림 이론(picture theory of ideas) – 우리의 생각은 그림과 비슷하다. 생각이 대상을 제대로 겨눌 수 있는 것은 그림처럼 대상을 닮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리의 관념과 소의 관념을 어떻게 구별할까? 이것에 대한 신통치 않은 답변을 하다 보면 결국은 순환 논법에 빠지게 된다.
인공지능 로봇은 ‘한낱’ 파생된 지향성, 즉 밖에서 주입된 지향성을 밑천으로 삼아 세상을 누비고 다니면서 자신의 과업을 처리하고 위험을 피해 나갈 것이다. 처음에는 공학자가 넣어 준 내용이 로봇이 가진 지향성의 주류를 이루겠지만 세상에 대한 정보가 하나 둘 싸이면서 로봇은 지향성의 내용을 스스로 바꿔 나갈 것이다. 어쩌면 인간도 로봇처럼 ‘한낱’ 파생된 지향성을 등불로 삼아 삶을 꾸려 나가는 존재일 지도 모른다.


3장 몸과 그 마음

감응력에서 감지력으로? 마음이 하는 일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고 신인 폴 발레리가 말한 적이 있다. 어떤 계를 조금씩 가속시켜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이제까지 없었던 마음을 탄생시킨다는 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 뇌를 구성하는 물질들의 빠른 회전이 어떤 식으로든 봉쇄 용기를 만들어 마음의 입자들이 그 안에 차곡차곡 쌓이다가 결정적 고비에 이르면 마음으로 응집되어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감지력이란 무엇일까? ‘감지력’은 대체로 가장 낮은 단계의 의식이라고 추정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쓴다. 카메라의 필름이 가진 단순한 ‘감응력’과 대비된다.
매질과 메시지
기능주의에서는 마음(믿음 또는 아픔 또는 두려움)의 본질은 마음을 이루는 구성 요소가 아니라 마음이 하는 일이라고 본다. 기능주의로 정의되는 대상은 다각 구현이 가능하다고 기능주의자들은 흔히 말한다. 아무 재료로든 인공 심장처럼 인공 마음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마음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 핵심만 파악하면 기준에 맞는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마음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이론가는 마음이 하는 일이 정보처리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마음은 몸을 다스리는 제어계의 임무를 맡고 있으므로 이 제어 작업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판별하고 저장하고 변형하고 처리해야 한다. 기능주의는 까다롭고 복잡한 작업의 특수성을 추상화하여 실제로 이루어지는 활동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이론은 참 깔끔해진다. 그렇지만 작업을 턱없이 단순화시키다 보니 이론도 지나치게 깔끔해진다.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이중 변환의 신화’이다. 먼저 신경계가 빛, 소리, 온도 따위를 신경 신호로 바꾸고 이어서 중앙의 특수한 부위에서 이 신경 신호를 또 다른 매질, 곧 의식의 매질로 바꾼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신경계의 주변부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은 단순한 감응에 불과하므로 중심부 어딘가에 감지가 이루어지는 곳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모양이다. 미지의 X라는 요소가 덧붙여져 단순한 감응력이 감지력으로 바뀐 다음에야 의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신경 자극은 의식의 재료가 될 수 없으므로 다른 무언가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뿌리 깊은 선입견 때문에 이런 생각이 먹혀드는 것이다.
신경망 자체가 그 정교한 구조, 놀라운 변형력, 신체를 다스리는 탁월한 능력에 힘입어 내부의 우두머리 역할을 할 수 있고 당연히 의식을 품을 수 있다는 주장은 아직은 터무니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유물론자는 이런 논리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다. 신경계를 정보 처리계로만 보는 입장을 허무는 그 복잡성을 끌어들여 우리의 상상력을 키우면서 ‘분별’이라는 막중한 책무의 일부를 몸에다 넘기자는 것이다.
몸에도 몸의 마음이 있다. 나는 내 몸에서 매끄럽게 떼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 이를테면 가치관, 재능, 기억, 기질 같은 것은 신경계뿐 아니라 나의 몸에도 담겨 있다. 마음과 몸에 대해 데카르트가 천명한 악명 높은 이원론의 유산은 상아탑을 넘어 보통 사람의 생각에도 깊숙이 박혀 있다. 정보가 뇌에 꼭 베껴지지 않더라도, 신경계의 ‘자료 구조’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신경계는 이것을 써먹을 수 있다. 신경계는 팔다리와 눈에 담긴 정보를 써먹고 거기에 기대도록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호르몬계에 담긴 정보도 써먹고 거기에 기대도록 만들어졌다.
몸에도 마음이 이미 있다면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마음은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일까? 몸 하나에 마음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인가? 때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몸에 바탕을 둔 원시 마음은 수십억 년의 세월 동안 생명을 유지시키는 과업을 묵묵히 수행했지만 상대적으로 느리며 무디다. 지향성도 근시안적이고 쉽게 속아 넘어간다. 세상과 치밀하게 겨루려면 더 빠르고 멀리 내다볼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마음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든다.


4장 생산과 검증의 탑

다윈 생물 – 유전자의 임의적 조합과 변이 과정에서 다양한 유기체 후보군이 만들어졌다. 현실 검증을 거쳐서 여기서 가장 우수한 설계 안이 살아남았다. 이 과정은 수백만 번의 주기를 거치면서 동식물 세계에서 놀라운 설계안을 대량으로 쏟아 냈다. 그러다가 이 참신한 생물 중에서 표현형의 유연성이라는 특성을 지닌 존재가 나타났다.
스키너 생물 – 스키너가 종종 지적한 것처럼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조작적 조건 형성’은 다윈이 말한 자연선택과 비슷한 개념이 아니라 그것이 더욱 확장된 개념이다. ‘선천적 행동은 물러나고 조건 형성 과정의 선천적 가변성이 들어선다.’ 1970년대의 인지 혁명은 심리학의 주류로 군림하던 행동주의를 몰아냈으며 그 후 유기체의 행동 능력을 고도의 적응성과 변별성을 가진 구조로 다듬는 스키너의 조건 형성 이론과 그 변형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각광 받기 시작한 ‘연결주의’와 신경 네트워크에 대한 활발한 연구는 우연히 짜인 회로로 생을 시작한 간단한 네트워크가 단순한 유형의 ‘경험(그 네트워크가 마주친 강화의 역사)’을 거치면서 자신의 연결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 주었다.
관념 연합론자 - 19세기 데이비드 흄. ‘흄은 고나념이 스스로 사고하게 끔 만들려고 했다’. 흄은 인상과 관념이 화학 결합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연합하고 그것이 마음 속에서 습관의 통로를 만든다는 탁월한 통찰을 내놓았지만 검증되기에는 모호한 구석이 너무나 많았다.
ABC 학습 모델 – 관념 연합론(Associationism), 행동주의(Behaviorism), 연결주의(Connectionism). 실제로 어떤 동물은 ‘단번에 배우는’ 능력이 있는 듯하다.
포퍼 생물 – ‘우리를 죽이지 않고 가설을 죽인다’. 행운의 선택을 한 덕분에 목숨을 구하는 단순한 스키너 생물과는 달리 포퍼 생물은 요행에만 기대지 않으면서 첫 수를 둘 정도로 영리하다. 선택을 거르는 여과 장치가 있어야 한다. 여과 장치는 안전하게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일종의 내부 환경에 해당한다. 모습은 다르더라도 그 내부 환경은 외부 환경과 외부 환경의 규칙성에 관한 정보를 듬뿍 담고 있어야 한다. 포퍼 이론의 매력은 박진감 넘치는 모의 비행 장치에서 생생히 드러난다.
감지력의 비밀을 찾아서: 중간보고 – 아픔의 주된 기능은 부정적 강화다
주광성에서 형이상학으로 – 인류학자들은 도구의 사용이 지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도구라 할 수 있는 것이 그레고리가 ‘마음의 도구’라고 부르는 언어다


5장 생각의 탄생

자연심리학자는 생각할 줄 모른다. – 생각은 혼자만의 힘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많은 이론가들이 고등 지능의 진화를 이렇게 일종의 군비 확장 경쟁으로 설명한다. 다른 행위자의 생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행동 능력은 자동으로 스스로의 생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행동 능력을 수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행위자는 자신의 제어계를 늘 미지로 남겨 두어야 할 의무가 있다. 예측 불가능성은 결코 탕진되어서는 안되며 항상 지혜롭게 사용되어야 하는 대체로 훌륭한 방어수단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뢰도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진실성을 담으면서도 자신의 선택 가능성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기만성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딱지 붙이기와 마음의 진화
혼잣말의 힘 – 새는 스스로의 깃털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없고 아기는 언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 – 놈 촘스키. 언어 사용자를 설계하는 지난한 작업은 이미 아득한 과거에 완성되어 주어진 맥락 안의 어휘와 문법 조건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타고난 재능과 성향의 형태로 유아에게 제공된다.


6장 우리 마음과 다른 마음

우리의 의식, 그들의 마음 – 북극곰은 말은 못할지언정 분명히 생각은 한다! 이는 동물의 영리한 행동에 인간의 의식과 흡사한 반성적 의식의 흐름이 수반되고 있으리라는 거의 맹신에 가까운 우리의 상상인지도 모른다.
아픔과 괴로움과 의식의 본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