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GUN


과학사


목차

요약
제1장 과학의 기원과 고대 그리스의 과학, 중세의 과학
제2장 천문학의 혁명과 근대 역학의 성립
제3장 근대 생리학의 성립과 근대적 과학 방법
제4장 근대 화학과 진화론의 성립
제5장 현대 과학의 출현
제6장 21세기의 과학기술
부록A 과학사 연표
부록B 과학자들


요약

105년 후한, 채륜, 종이 발명
750년경, 제지법 유럽 전래
1000년 송, 나침반과 화약 발명
1450년 구텐베르크, 활판 인쇄술
1543년 코페르니쿠스, 지동설 주장
1583년 갈릴레오, 진자의 등시성 발견 (낙하의 법칙, 1589)
1590년 얀센, 현미경 발견
1609년 케플러의 제1, 2법칙 발표 (제3법칙, 1619)
1628년 하비, '심장과 혈액순환'
1643년 토리첼리, 대기압 측정
1653년 파스칼의 원리 발표
1662년 보일의 법칙 발견
1665년 훅, 세포의 발견
1675년 레벤후크, 미생물, 적혈구 발견
1678년 호이겐스, 빛의 파동설
1687년 뉴턴, 만유인력의 법칙 발표
1752년 프랭클린, 피뢰침 발명
1769년 제임스 와트, 증기기관 발명
1774년 라부아지에, 질량보존의 법칙 발견
1785년 쿨롱의 법칙 발견
1787년 샤를의 법칙 발견
1791년 갈바니, 동물전기 발견
1799년 프루스트, 일정성분비의 법칙 발견
1800년 볼타전지 발견
1803년 돌턴의 원자론 주장
1809년 라마르크, 진화론, 용불용설 주장
1825년 스티븐슨, 증기기관차 제작
1831년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법칙 발견
1840년 줄의 법칙 발견
1854년 맥스웰, 전자기장 방정식 발견
1859년 다윈, '종의 기원' 발표
1865년 멘델, 유전의 법칙 발견
1869년 멘델레예프, 원소 주기율표 작성
1879년 에디슨, 전구의 발명
1895년 뢴트겐, X선 발견
1898년 퀴리 부부, 라듐과 플로늄 발견
1905년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이론 (일반상대성이론, 1916)
1911년 러더퍼드, 원자핵 발견
1912년 베게너, 대륙이동설 주장
1913년 보어, 원자구조 발표
1945년 미국, 원자폭탄 제조
1953년 왓슨-크릭, DNA 분자구조 밝힘
1957년 소련,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959년 소련 루나 2호 달착륙 (무인)
1969년 미국 아폴로 11호 달 착륙 (~아폴로 17호, 1972년)


제1장 과학의 기원과 고대 그리스의 과학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도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과 유사한 활동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1800 년 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바빌로니아에서는 수학과 천문학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고,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3000년 경부터 역법이라든가 수학 그리고 의학이 발달했다.
이집트인들은 태양력을 발명했고 일년을 365일로 나눈 달력을 사용했다. 그들의 일년은 한달이 30일로 된 열두달과 마지막의 5일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이집트에서는 하루를 24 시간으로 나누고 그에 맞추어서 시각을 정했다.

과학활동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철학자 포퍼(Karl R. Popper, 1902-1994)는 과학을 지식의 집합체로 봐서는 안되고 오히려 가설 또는 추측의 체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과학활동의 핵심은 과학지식을 쌓아놓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의 체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관찰한 사실을 바탕으로 가설이나 이론을 만들어서 자연 현상을 설명하려는 노력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따라서 과학은 기원전 600년 경에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철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이론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기존 이론의 바탕 위에서 더욱 설득력이 높은 이론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서 아낙시메네스가 공기가 세계의 근원물질이고 공기의 희박화와 농축화에 의해서 만물이 생성된다는 이론을 살펴보면, 그가 탈레스의 물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는 공기나 흙과 같은 물질이 어떻게 물에서 형성되는가 라는 의문을 품었을 것이고, 이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공기가 물보다 더 근원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다른 사람의 것보다 더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그후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일반적인 방법이 되었다.
그리스의 밀레토스는 독립된 도시국가였고, 독재자에 의해서 통치된 적도 있지만 대체로 민주제도를 정치 체제로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민들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고 각각 다른 의견을 가지고 활발하게 토론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여건 위에서 그들은 어느 것이 더 나은 정치 체제인가라는 문제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세계의 생성과 자연 현상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사변하고 토론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자유로운 토론의 분위기가 밀레토스에서 과학이 출현하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과학
- 플라톤 (Platon, 기원전 429 - 347) : 아카데미아(Akademia)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씌어 있었다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 : 아카데미아(Akademia) 에서 20년 공부
- 헬레니즘 시대 :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BC 330년경) ~ 그리스, 서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페르시아에 걸치는 넓은 지역을 정복
- 아르키메데스(Arkimedes, BC 287~212) : 나사와 기중기를 만들었고, 전쟁 무기를 고안했다.

중세의 과학
- 유럽 : 성서 연구 중심으로 과학 발전 미비
- 아랍 : 12세기에 들어서며 학문에 적대적인 이슬람 정통파가 득세했고, 아랍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나빠진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도 천문학은 15세기까지 계속해서 발달했지만,15세기가 되면 아랍 과학은 정체됨
- 중세 과학연구의 방향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오캄 (William of Ockham, 1285-1349)의 학설이었다. 오캄은 프란치스코 교단의 수도사로서 철학과 논리학에 능통했던 신학자였는데, 단죄 이후에 나온 신학자들의 노력을 계승하여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노력했다.
필연적 연관성의 부재에서 출발하여 모든 지식은 선험적 추론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급진적 경험주의 에 도달했다. 또한 오캄은 보편 개념이란 실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개개의 물체를 나타내기 위한 이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제2장 천문학의 혁명과 근대 역학의 성립

르네상스 : 르네상스 시대는 보통 15 세기 초부터 17 세기 초에 걸쳐 라틴 서양세계에서 학문과 예술이 크게 부흥하는 시기를 말한다.
- 첫째, 르네상스기에는 중세 스콜라 학풍의 번역과 주해를 거부하고 그리스 원전 자체를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 둘째, 중세에는 학문적 저작과 학자들의 대화에서 라틴어만 사용되었던 것에 반해서, 르네상스기에는 민족언어의 사용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 세째, 스콜라 학자들은 어떤 이론이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도구로서 논리만을 주로 사용했는데, 르네상스 시대에는 관찰과 실험, 즉 직접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 네째, 교회의 권위와 봉건제가 서서히 쇠퇴하면서 기술이 발달했고, 그 결과 수공업자들의 지위가 상승했다. 과학의 발달과 관련해서는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장인들의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 다섯째, 신비주의가 널리 퍼졌다. 예를 들어 우주의 신비를 푸는 열쇠는 수학과 기하학에 있다고 하는 신플라톤주의, 우주는 신비적인 힘들로 가득 차 있는 네트워크이고 인간은 이 힘들과 상호작용해서 우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하는 헤르메스주의, 인간이 본질적으로는 우주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대우주-소우주 유비관계에 관한 생각, 그리고 성서를 숫자로써 풀려고 했던 카발라 전통과 같은 신비주의가 널리 퍼졌던 것이다.

과학혁명
- 과학혁명은 그 내용만을 분리해서, 즉 이에 크게 기여했던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튼 등의 업적만을 분리해서 고찰할 수는 없다.
- 이들은 모두 르네상스기의 다양한 사건이나 사조의 영향을 풍부하게 받았다. 따라서 과학혁명은 앞에서 말한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가지 새로운 분위기가 점차로 익어감에 따라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르네상스 시대 중엽, 즉 16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굳이 연도를 든다면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체계를 내세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가 발표된 1543년에 시작되어 뉴튼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가 출판된 1687년에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지구는 둥글다
14세기나15세기초에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것을 짐작하거나 알고 잇었던 사람들이 많았던것 같다. 지구는 둥글다고 최초로  말한 사람이  마젤란이네 콜럼버스이네 또는 토스카넬리이네 하고 말이 많습니다 .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지구는 둥글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토스카넬리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나 자신의 학문적 지식으로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면 인도로 갈수 있다는 뜻을 콜럼버스에게 전했다고 한다 .
그것은 이미 지구가 둥글어서 한쪽으로 계속 가면 원하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마젤란도 지구는 평평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나?

기원전 2세기경의 종이가 중국에서 발굴된 바 있고 105년경에 중국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은 최초로 근대의 특징이 될 만한 종이 제작법을 기술했다.
중국의 4대 발명품으로 종이, 화약, 목판 인쇄술, 나침반을 든다.
종이의 제작법은 중국에서 이슬람 문화권을 거쳐 13세기경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유럽인은 물레방아를 이용해 수력으로 종이를 제작하는 제지 공장을 건설하였다.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 추르 라덴 춤 구텐베르크(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 1398년경 ~ 1468년 2월 3일)는 약 1440년 경에 금속 활판 인쇄술을 사용한 독일의 금(金) 세공업자이다. 본명은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Johannes Gensfleisch)이고, 구텐베르크는 통칭이다. (영미권에서는 구텐버그라고 발음한다.)
구텐베르크의 업적은 활자 설계, 활자 대량 생산 기술을 유럽에 전파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업적은 이런 기술과 유성 잉크, 목판 인쇄기 사용을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활자 제작 재료로 합금을 사용하고, 활자 제작 방식으로 주조를 채용하였다.

지구중심의 우주체계는 2세기에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수학적으로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고대에는 오래 전부터 행성의 역운동, 행성 속도의 불균일성 등이 알려져 있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여러가지 기하학적 도구를 도입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그는 역운동은 소원이란 것을 도입해서 설명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모든 천체 현상을 수학적으로 정밀하게만 설명하려 한 결과 수없이 많은 천구가 뒤엉켜서 돌고 있는 아주 복잡한 우주체계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가지고 있었던 더 커다란 문제는 그의 체계에서는 플라톤 이후로 지켜져 왔던 완전한 원운동이라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결합해서 고대와 중세의 지배적인 우주체계가 되었다.

코페르니쿠스
- 1510년 경에 이미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코멘타리올루스 (Comentariolus)라는 소책자에 자기 생각을 담아 유럽의 몇몇 천문학자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 생각을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세상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의 우주체계는 그가 죽던 해인 1543년에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서 발표되었다.
-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우선 그는 행성들이 붙어서 돌고 있는 천구라는 개념을 그대로 사용했고,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원운동을 가장 완전한 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천구들이 원운동을 한다는 견해를 고수했다.
- 그래서 그는 관측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소원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마찬가지로 많은 천구가 뒤엉켜서 돌고 있는 복잡한 우주체계였다.
- 극단적으로 말하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체계에서 지구와 태양의 위치만을 바꾸어 놓은 결과가 나오고 만 것이다. 그리고 또 지구가 태양주위를 돌면 시차가 관찰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관찰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었다.
- 이 시차는 별들이 지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시차가 관찰되지 않는 것에 대해 고대의 아리스타르코스와 같이 우주가 매우 크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설명을 했다.
- 그런데 지구가 태양주위를 도는 태양중심의 우주체계는 시차의 확인을 통해서만 완전하게 증명할 수 있는데, 이 시차의 확인은 19 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의 천문학자 베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는 사실은 겨우 100년 전에야 증명된 것이다.

티코 브라헤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천체 관측 분야에서 대단히 뛰어난 업적을 남긴 관측의 천재였다. 아마 천문학 역사상 티코와 같은 관측의 천재는 그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티코는 덴마크의 벤이라는 섬에 하늘의 성 (Uraniborg)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대한 천체 관측소를 건설하고 정교하게 제작한 관측기구를 가지고 정열적으로 별들을 관측했다. 그런데 그는 수학적인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신의 관측 자료를 가지고 어떤 획기적인 우주체계를 내놓지는 못했다.
그가 제시한 우주체계는 지구중심체계와 태양중심 체계를 혼합한 일종의 타협적인 것이었다. 티코의 우주체계에서는 지구가 여전히 우주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고, 수성과 금성만 지구 주위를 도는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이다.

근대 천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원래 루터파 성직자가 되려고 했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다.
1596년에 우주의 신비 (Mysterium Cosmographycum)라는 책을 출판하는데, 이 책을 내놓으면서 그의 천문학자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우주의 신비 는 책 제목이 말하듯이 수학적 계산이 아니라 신비적인 사변에 의한 결과를 담고 있는 책이다.
케플러와 티코가 함께 일을 한 지 1년 후 티코 브라헤가 왕실의 연회에 참석하고 온 뒤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래서 케플러는 티코가 남긴 매우 귀중한 관측자료를 모두 넘겨받아 약 5년 동안 화성의 궤도를 발견하기 위한 씨름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케플러의 제일법칙과 제2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두 개의 법칙은 1609년에 출판된 새로운 천문학 (Astronomia Nova)이란 책에 들어 있는데,
- 제1 법칙은 행성의 궤도가 타원을 그린다는 것이고, - 제2법칙은 행성과 태양을 잇는 선이 일정 시간 동안 휩쓸고 지나간 면적은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다.
- 이제 케플러의 케3법칙이 남는데, 이 법칙은 그보다 훨씬 뒤인 1619년에 우주의 조화 (Harmonice Mundi)라는 책에 발표되었다. 이 책에는 우주에 관한 온갖 조화의 법칙들이 들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케플러의 제3법칙이다.
- 케플러의 제3법칙은 행성 주기의 제곱과 태양으로부터 행성까지의 평균거리의 세제곱의 비는 일정하다는 것이다.
- 천구와 소원이 사라졌고, 완전한 원운동이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도 제거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케플러의 노력에 의해서 태양중심의 우주체계가 거의 완벽해지기는 하지만, 그의 저작들은 너무 수학적이고 어려워서 천문학자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갈릴레이는 1609년에 어느 홀란드 사람이 망원경을 발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가 직접 배율이 30배 되는 망원경을 제작해서 하늘을 관찰했다.
1610년에 별들의 소식 (Sidereus Nuncius)이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이 발견으로 그는 하루아침에 유럽 전역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고 태양중심체계를 옹호하던 케플러 같은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근대 역학은 갈릴레이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의 수학이 매우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으며, 수학으로 파악할 수 없는 현상들은 과학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갈릴레이의 초보적인 관성개념은 그후 데카르트에 의해서 직선운동의 관성개념으로 확장되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해서 우주는 신이 정한 완벽한 법칙에 따라 질서있게 운동하는 물질로 가득 차 있다는 기계적 철학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하다.

아이작 뉴턴 (Führer Isaac Newton, 1642년 12월 25일 ~ 1727년 3월 20일) 잉글랜드의 물리학자, 수학자이다.
1687년에 뉴튼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rincipia philosophia mathematica naturalia), 일명 프린키피아를 발표하여 천문학과 역학을 결합함으로써 태양중심체계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프린키피아에는 만유인력의 법칙과 이 법칙에 따라 행성이 타원 궤도를 그리면서 돈다는 것이 수학적으로 증명되어 있다.

연주 시차(年周視差)
- 어떤 천체를 바라보았을 때 지구의 공전에 따라 생기는 시차를 뜻하며, 지구 공전의 결정적 증거이다.
- 연주 시차는 실제 시차의 절반, 즉 태양과 바라보는 천체를 잇는 직선, 그리고 지구와 바라보는 천체를 잇는 직선이 이루는 각으로 나타낸다.
- 최초의 연주 시차측정은 1838년 프리드리히 베셀이 백조자리61번별을 주기적으로 관측하여 0.62초각이라는 정확한 연주 시차를 측정에 성공한다. 1분은 1°의 1/60에 해당하며 1초는 1분의 1/60에 해당한다.
- 연주 시차를 구하면 해당 천체와의 거리를 구할 수 있다. - 그러나 대부분의 별은 매우 멀리 있어 연주시차도 아주 작기 때문에(최대가 센타우루스자리 알파의 연주 시차인 0.76초각) 지구의 대기 산란 효과 등으로 인해 미세한 연주시차는 계산할 수 없으며, 때문에 연주시차를 사용해 천체와의 거리를 구하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며 상대적으로 가까운 별들의 거리만 잴 수 있다.
- 지표에서 측정하면 멀게는 100파섹 정도에 있는 별까지의 거리를 알 수 있다. 보다 먼 별, 성단이나 은하의 거리는 포거슨 방정식이나 허블공식을 사용하여 별의 거리를 구한다. 최근에는 인공위성을 사용해 더 멀리 있는 별들의 연주시차를 구하는 프로젝트도 계획되고 있다



제3장 근대 생리학의 성립과 근대적 과학 방법

그리스 학자들은 생물을 식물, 동물, 인간으로 나누어서 생각했다.
그리고 생물체는 그 자신의 본질에 따라서 성장의 원리, 운동의 원리, 사고의 원리라는 세가지 원리 중에서 한가지 또는 그 이상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식물은 자라기만 하고 장소를 이동하지는 않기 때문에 성장의 원리를 가지고 있고, 동물은 장소이동도 하므로 성장과 운동의 원리 그리고 인간은 성장과 운동의 원리 외에 사고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또한 이 세 가지 작용 즉 성장, 운동, 사고 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세 개의 영(spirit, 기운)이 있다고 보았는데, 이 세 영은 자연의 영, 생명의 영 그리고 정신의 영이다.
자연의 영은 성장을 가져오고, 생명의 영은 운동을 유발하고, 정신의 영은 사고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낡은 과학방법을 비판하고 새로운 방법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은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과 프랑스의 르네 데카르트였는데, 이들의 귀납적 방법과 연역적 방법은 모두 당시에 활동했거나 그 뒤에 나온 과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베이컨은 우선 그때까지 축적된 그리스 학문과 그에 대한 주석을 모두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서 학자들은 사실, 관찰 그리고 실험결과를 수집해서 그에 대한 목록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 일이 모두 완성된 다음에 우리는 그 목록에 수집된 사실을 바탕으로 참된 이론과 자연법칙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이 주장에 그의 귀납적 방법이 들어 있다

데카르트는 기존의 모든 지식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의심하는 극단적인 회의를 통해서 신과 자기 존재의 실재만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실재를 믿는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수학적 진리들은 자연의 법칙인데, 신은 이것들을 인간에게 선물처럼 주었다. 그러나 이 법칙들은 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작용한다. 이 법칙이 물질에 작용할 때 어떠한 저항도 없는 것이다.
모든 자연현상을 기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기계적 철학을 체계화했는데, 이는 그의 방법이 연역적이고 수학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데카르트의 연역적 방법과 기계적 철학은 18세기 중엽까지 프랑스와 독일의 대륙과학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 결과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의 방법과 기계적 철학은 지나치게 연역을 강조한 결과 독단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7세기에는 새로운 과학방법과 과학단체의 출현 외에도 근대적인 과학연구에 필수적이었던 여러가지 기구가 발명되었다.
이 기구들 중에서 중요한 것으로는 망원경, 현미경, 정밀시계, 온도계, 기압계, 공기펌프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 망원경은 하늘의 연구를 혁신할 기구를 천문학자들에게 제공했다. 특히 갈릴레이는 획기적인 천체 현상을 발견하는 데 이 기구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현미경은 하비의 피의 순환이론을 확인할 수 있게 했고,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줌으로써 생물학 연구의 지평을 크게 넓혀주었다.
그리고 공기펌프는 중세까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던 진공을 만들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과학자들에게 제공했다. 이 진공펌프를 가지고 처음으로 여러가지 과학실험을 했던 사람은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보일이었다.

과학활동의 중심이 대학이었지만, 16,17세기에 들어오면 대학은 오히려 새로운 과학의 출현에 방해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학문의 주된 장소가 과학연구에 대해서 폐쇄적이었던 상황에서 대학 밖에서 활발하게 수행되었던 과학활동은 대학이란 교육기관과는 성격이 다른 과학단체의 출현을 가져오게 되었다.
과학단체는 이러한 대학 밖의 과학연구자들이 서로 활발한 의사소통을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왕립 과학아카데미와 영국의 왕립학회)


제4장 근대 화학과 진화론의 성립

16세기와 17세기에 형성된 근대과학에는 천문학, 물리학 그리고 생물학 분야가 들어있지만, 화학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화학분야의 혁명이라고 할 만한 것은 다른 학문분야보다 약 100년 쯤 늦게 일어났는데, 그 이유는 화학이 다른 분야와 달리 수학적 계산을 통해서 근본적인 법칙을 발견하거나 정밀한 관찰을 통해서 새로운 기본 원리에 도달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연금술이 다시 융성하고 공업적 화학이 발달함으로써 실용 화학에서 많은 새로운 결과들이 쌓였고 이러한 결과들을 해석하기 위해 여러 철학자들과 화학자들이 새로운 해석틀을 세우려고 했지만, 화학의 기초가 될 만한 근본적인 물질이론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화학 분야에서 혁명적인 전환을 이룩할 이론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라부아지에와 톨턴에 의해서 확립되었다.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Lavoisier, 1743-1891)의 연소이론과 원소이론 그리고 돌턴의 원자론이 19세기에 화학이 급속도로 발달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준 것이다.

18세기에 그때까지 알려져 있던 화학현상 전반을 설명해 주었던 이론체계는 플로기스톤 이론이었다.
플로기스톤 이론은 석탄이나 나무가 불에 잘 타는 이유는 그 속에 플로기스톤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이것이 물질이 탈 때 그 물질로부터 빠져나오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설명했다.
이 이론은 연소만이 아니라 금속의 하소( 瑕燒, calcination)도 금속에서 플로기스톤이 빠져나오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하소는 금속이 높은 온도에서 산소와 결합하는 현상을 말한다.
금속이 서서히 녹이스는 것도 일종의 하소로 볼 수 있다. 또한 플로기스톤 이론은 광석을 숯불로 가열해서 금속을 얻는 제련과정에 대한 설명도 제공했다.
이 이론은 금속이 생성되는 이유를 숯이 탈 때 플로기스톤이 빠져나와 광석하고 결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광석이 플로기스톤을 얻음으로써 금속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나무가 타거나 쇠가 녹스는 이유는 나무나 쇠가 산소와 결합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연소나 하소가 물질 속의 무언가가 빠져나감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설명이 아주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일상경험에 비추어 보면 나무나 석탄이 타고나면 원래의 물질은 거의 다 없어지고 재만 남기 때문에, 연소 때에 무언가가 빠져나간다고 하는 생각이 더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플로기스톤 이론은 일상경험에도 부합하고 여러가지 현상을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화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프리스틀리는 1774년에 수은의 금속재를 가열해서 분해하는 실험을 했으며, 이 실험을 통해서 연소를 돕고 물에는 녹지 않는 성질을 가진 공기를 순수하게 분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산소라고 하는 아주 새로운 물질의 발견이었고, 플로기스톤 이론의 폐기를 가져올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다.
그렇지만 프리스틀리는 이 발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에 자신의 이 중요한 발견에 대해서 어떠한 해석도 내리지 못하고, 단지 그것을 자기 동료들에게 알리는 정도로만 그치고 말았다.
프리스틀리는 또한 다른 실험들을 통해서 이 공기가 호흡에도 아주 좋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그는 끝내 이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산소라는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플로기스톤 이론에 집착한 나머지 이 공기를 플로기스톤이 없는 공기라고 불렀다. 그가 그렇게 불렀던 이유는 이 공기가 플로기스톤이 없기 때문에 다른 물질로부터 플로기스톤을 잘 빨아들이고, 그 결과 연소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부아지에는 산을 만드는 기체에 관한 연구를 게속한 결과 이 기체가 연소와 하소가 일어날 때 물질과 결합하는 기체라는 사실도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산을 만들고 연소와 하소에 관여하는 기체인 산소라는 존재가 발견 또는 확인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 라부아지에는 물을 분해하는 실험을 통해서 물이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라는 사실과 호흡도 산소가 서서히 결합되는 현상이라는 것을 밝혀냈고, 1780년대 말에 연소는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 연소이론을 내놓았다.
라부아지에는 또한 새로운 연소이론을 확립한 것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명명법을 도입함으로써도 근대화학의 확립에 기여했다.
라부아지에는 여러가지 원소의 존재를 바탕으로 그의 화학체계를 만들어냈지만, 그는 그 원소가 각각 특정한 무게를 지닌 원자로 환원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우리는 예를 들어서 산소라는 원소의 최종 구성단위는 산소 원자 하나이고 이 산소 원자는 특정한 무게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라부아지에는 원자의 존재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화학분야의 혁명은, 그 후 프루스트가 일정성분비의 법칙을 내놓고, 돌튼의 원자론과 배수비례의 법칙에 의해서 화합물의 조성이 설명되면서 완성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생물학은 물리학이나 천문학과 달리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물론 17세기에 하비에 의해서 혈액순환 이론이 확립됨으로써 근대 천문학이나 역학과 함께 생리학 분야의 혁신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생리학은 생물학의 작은 분야의 하나였기 때문에 생물학 전체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생물학은 결국 18세기를 거쳐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진화론, 유전학, 근대적인 분류학이 성립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벗어나 근대과학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 중에서 진화론의 확립은 생물학 전체뿐만 아니라 사회 사상에도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진화론은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함으로써 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윈 한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성립한 것은 아니다.
이미 다윈과 거의 같은 때에 월리스가 말레이지아 군도를 여행하면서 자연선택의 반복에 의한 생물진화라는 생각에 도달했고 이것을 다윈보다 먼저 발표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당시에 그리고 그 전에 이미 진화라는 관념이 사람들 사이에서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진화론은 다윈에 의해서 체계화되기는 했지만 그 확립에는 여러 분야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진화론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학문분야로는 지질학, 자연신학, 고생물학, 분류학 등을 들 수 있다.

지질학이 발달하면서 지층의 생성에 관한 이론이 출현했다.
지층의 생성에 관한 당시의 대표적인 이론은 수성론(水成論)과 화성론(火成論)이었다.
수성론은 지층의 형성에서 물의 작용을 중시하는 이론이었고, 화성론은 불의 작용을 중시하는 이론이었다. 이중에서 화성론이 진화 관념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수성론에 의하면 최초에 원시대양이 지구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 속에는 많은 물질이 녹아 있거나 입자로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바다의 수면이 낮아짐에 따라 바다 속에 녹아있거나 흩어져 있던 물질이 원시암석으로 석출하여 바닥에 쌓였고, 이에 의해 지구표면은 처음으로 암석층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 다음에 바다 수면이 더 낮아지면서 이 암석층의 일부가 물밖으로 나와 육지가 되었고, 그후 이 육지가 침식되고 바다속의 물질들이 석출하여 또다시 바다 밑바닥에 쌓임으로써 두번째 암석층이 생성되었다.
수성론에선 현재 우리가 발견하는 암석층들은 이러한 과정이 계속된 결과로 형성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수성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처음에 물이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줄어 들었느냐를 설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화성론은 오래 전부터 육지가 존재했으며 이 육지가 침식에 의해서 깎이고 이 물질들이 바다에 침전한 다음에 지구의 열을 받아 단단해져서 암석층이 형성되었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암석층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 내부의 열과 압력에 의해서 융기하고, 이동하고, 변형되는데, 이에 의해서 갖가지 형태의 산과 골짜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화성론에서는 이러한 침식과 암석의 형성 그리고 융기 이동 변형이 오랜 기간을 두고 계속해서 반복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현재의 지구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수성론은 원시대양이 최초에 있었다가 점차 없어졌고, 지표면의 불규칙성은 바다의 대격변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지구의 역사를 길게 잡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화성론은 육지의 침식과 침전, 융기와 변형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지구의 나이를 매우 긴 것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후에 화성론이 수성론보다 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이면서 이 지질학적인 아주 긴 시간은 생물체에도 적용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 결과 화성론은 생물체가 갑자기 창조된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을 통해서 점점 변화되었다는 진화의 관념이 형성되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진화관념의 형성에 기여한 자연신학의 목적은 신이 창조한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신의 섭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18,19 세기에 영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자연신학에서 추구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19세기 초에 영국에서 활동했던 자연신학자 페일리(William Paley)의 유명한 유비관계이다.
이것은 시계와 시계공의 관계를 자연과 신의 관계와 대비시킨 것인데, 그는 우리가 시계를 보면 그것을 만든 시계공이 있음을 알 수 있듯이 자연을 보면 그것을 창조한 신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페일리는 이러한 유비관계를 가지고 우리가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신의 계획과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자연신학이 진화관념의 형성에 공헌한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물의 적응이라는 문제에 관한 연구였다.
우리는 자연계의 모든 생물체가 주위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자연신학자들은 생물이 적응 메카니즘을 갖게 된 것은 신이 생물체를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자비롭게 창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생물체의 환경에 대한 적응이라는 예를 통해서 신의 자비를 보여주기 위해 그와 관련된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이러한 자료들과 연구결과가 진화관념이 형성되는 데 기여를 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자연신학자들의 생각에서 더 나아가서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신의 자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과정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생각을 하면, 바로 진화라는 생각이 도출된다.

고생물학은 생물체의 화석잔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화석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프랑스의 라마르크와 퀴비에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이들 고생물학자들의 화석 연구가 진화 관념이 형성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그들은 라마르크만 빼고는 대부분 퀴비에로 대표되는 격변론(catastrophism)을 지지하는 사람들로서 생물체가 진화한다는 생각에는 철저하게 반대했다.
라마르크는 주로 무척추 동물의 화석을 연구했는데, 그는 이 화석들이 서로 다른 지층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해석과정에서 생물이 진화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진화론을 제창한 다윈은 이와 같은 여러가지 배경, 즉 진화관념이 서서히 생성되기 시작하고 있던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고 교육을 받았다.
그는 평범한 학생 시절을 마치고, 16살 때에 의사가 되기 위해 에딘버러 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1828년 해부학 시간에 구토를 일으키며 교실을 뛰쳐나간 뒤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성직자가 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다.
다윈의 본격적인 생물학 연구는 1831년에 시작된 비글호 항해에서 시작되었다. 항해를 떠나기 직전에 그는 생물이 진화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는 책을 한권 받았는데, 이 책은 지질학자 라이엘이 쓴 지질학 원리 (The Principles of Geology)였다.
이 책에서 라이엘이 주로 주장했던 것은 현재는 과거에 대한 열쇠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비글호 항해는 1836년에 끝났다.
다윈은 영국으로 돌아와서 자기가 비글호 항해 중에 얻었던 결론, 즉 하나의 옛 종으로부터 새로운 종들이 변이 과정을 거쳐 생겨난다고 하는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몰두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는 왜 변이하느냐, 다시 말하면 변이 메카니즘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다윈은 이것을 찾는 중에 농부들이 식물과 동물들을 인위적으로 번식시켜 우수한 형질을 얻는 것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 대한 연구 끝에 그는 생물을 인위적으로 선택해서 번식시키면, 많은 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자연 속에서도 그런 변이 과정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메카니즘에 의해서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었다.

자연 속에서 작용하는 변이 메카니즘을 찾던 중 1838년 가을에 다윈은 우연히 맬더스의 인구론을 읽게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찾았던 해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구론 에서 맬더스는 인간 사회에는 근본적으로 식량부족 현상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싸움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는데, 다윈은 이 생존경쟁을 생물체에 적용했다.
즉 그는 이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변이를 일으키는 힘을 발견했던 것이다. 적응 능력이 강한 개체가 남는 과정을 그는 인위선택과 대비되는 개념을 사용해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고 불렀다.
다윈은 자연선택이라는 메카니즘을 가지고 새로운 종의 출현 즉 종이 진화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것을 즉시 발표하지 않고 그 후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 증거를 찾는 일로 보냈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 생각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을 때 생겨날 수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 예를 들면 기독교와의 마찰이라든가 그 자신에 대한 엄청난 비난 같은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그가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공개적인 논쟁을 아주 싫어했기 때문이다.
다윈이 1858년에 월리스의 논문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의 진화론에 대한 출판은 더 늦어졌을 것이다.
월리스는 자연사나 생물학을 따로 배우거나 연구하려 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직업상 남아메리카와 말레이지아를 여행할 수 있었고 이때 그 지역의 동식물을 관찰했다.
이 관찰 여행에서 그는 각 종들의 차이에 대해서 주목하게 되었고, 종 사이에서 변이가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했으며, 다윈과 마찬가지로 인구론을 읽고 그 메카니즘을 발견했다.
다윈과 똑같이 야생동물의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고 그 결과 생물체들의 진보와 분지가 있다는, 즉 새로운 종이 자연선택에 의해서 출현한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월리스는 자신의 결론에 관한 짤막한 논문을 써서 다윈에게 보내고, 그의 마음에 들 경우 학회지에 발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논문을 받고 다윈은 크게 낙담했다. 왜냐하면 그 논문을 발표할 경우 발견의 우선권은 월리스에게 돌아가고, 다윈의 오랜 기간에 걸친 연구는 헛수고가 되고 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 라이엘의 중재에 의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견해는 두 사람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공동 발표 뒤 다윈은 종의 기원 의 집필에 몰두하여 몇개월만에 탈고해서 출판했다.

종의 기원 (The Origins of Species)은 출판되자마자 결국 다윈이 염려했듯이 신학자들의 매우 커다란 반발에 부딪쳤다. 종의 기원이 과학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생물학자들이 자연선택설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렸지만, 이 책은 그 생물학자들 대부분을 진화론자로 만드는 데 기여했고, 생물체가 신의 설계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생각을 버리게 만들었다.
사회에 대한 충격도 매우 컸다. 진화론이 옳건 그르건간에, 그것은 인간을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자연의 일부분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의 문제 즉 인간의 특성 기원 운명에 관해 아주 새로운 생각을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윈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나온 것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개인과 개인 또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생존을 위한 경쟁이 인류 역사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하는 사회 다윈주의 (social Darwinism)이다.
사회 다윈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은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Herbert Spencer)이다. 그는 적자 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거의 모든 사회현상에 이 진화 관념을 적용했다.

다윈의 이론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변이가 어떤 방식으로 유전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윈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말았다.
유전의 문제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사 멘델에 의해서 해결되었는데, 그의 유전 법칙은 1900년에 가서야 드 프리스, 코렌스, 체르막의 재발견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후에 생물학자들은 다윈의 진화론과 유전 법칙을 종합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이 두 이론이 결합된 종합 진화 이론 (Synthetic Theory of Evolution)은 그후에도 수십년이 지난 뒤에야 완성되었다.


제5장 현대 과학의 출현

다윈의 진화이론과 멘델의 유전법칙으로 이제 생물학마저 기계론적 과학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18, 19세기에 낭만주의와 독일 자연철학이 등장하여 기계론으로부터 유기체적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낭만주의적 ‘반동’에 가담한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였다. 물론 괴테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독일 계몽사조의 최고봉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괴테는 과학 이외의 부문에서는 대단히 계몽적이었지만 과학에서는 뉴턴적인 냉혹한 과학을 따뜻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고, 그의 이러한 의도가 낭만주의적 과학으로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자연에 다시 생기를 불어 넣으려는 괴테의 생물학적 낭만주의는 독일에서 자연철학(Naturphilosophie)이라는 학파를 낳는 데 영향을 미쳤고, 자연철학은 독일 과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말이 되면 자연철학은 기계론적 과학에 완전히 패퇴당하고 만다.

20세기 현대과학의 혁명, 특히 현대물리학의 발전에 상대성이론 못지않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이론이 있다. 바로 양자이론이다.
양자이론은 미시세계의 사물들이 거시세계의 그것과 달리 불연속적이고 확률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고 운동한다고 주장함으로써, 3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뉴턴-패러다임을 부정하였다.
뉴턴은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기계, 즉 인과적이고 결정론적인 관계들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와 같다고 생각하였다. 뉴턴이 보기에 이 우주는 신의 완벽한 창조물로서 규칙적이고 조화로운 존재자이며, 따라서 자연법칙에 의해 언제나 정확하고 완벽하게 예측될 수 있다.
또한 뉴턴은 “자연을 수학의 언어로 쓰여 진 교과서”로 보고 이 같은 결정론적 우주를 수학(언어)을 통해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다고 믿었다. 양자이론은 이러한 믿음들을 근본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양자이론에 따르면 우연 혹은 확률과 예측불가능성이 이 우주를 지배하게 된다.
즉 비록 우리가 현재의 우주 상태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 하더라도, 미래의 상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오직 확률적 예측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고전역학에서는 운동하는 입자에 대해 어떤 시각에서건 그것의 위치(x)와 그때의 운동량(p, 혹은 속도)의 값을 동시에 결정할 수 있다.
즉 나무에서 떨어지고 있는 사과의 경우 매 순간마다, 사과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결정(측정)할 수 있다. 만약 위치나 운동량에 대한 측정값이 불확정적으로 (즉 오차 범위를 갖는 값의 분포 형태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측정기술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여겼다.

양자역학의 입장에서는 근본적으로 입자의 위치 x와 운동량 p를 동시에 확정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에너지와 시간도 이와 마찬가지로 확정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혹은 확정적으로) 정하려고 하면, 운동량의 불확정도가 무한히 값이 커지게 되고, 그 결과 운동량의 값이 확정되지 않게 된다.
반대로 운동량을 정확히 측정하려 하면, 위치가 불확정해진다. 그래서 입자의 위치를 확정하면 운동량을 알 수 없고, 입자의 운동량을 확정하면 위치를 알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1927년 하이젠베르크가 정식화한 불확정성원리다.
이 원리의 기본 골격은 고전적인 입자성이 더 이상 양자역학에서는 수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입자의 물리량에 대한 측정결과가 반드시 확정된 값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여러 값들의 확률적 분포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1895년 16세의 아인슈타인은 빛을 타고 달리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무런 결론도 내릴 수 없었지만 10년이 지난 후인 1905년 이 사고실험은 특수상대성 이론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특수상대성 이론을 뒷받침하는 두가지 원리는 광속불변의 원리와 상대성 원리이다. 광속불변의 원리는 빛의 속도는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빛과 평행한 방향으로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우리에게 보이는 빛의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시간의 길이와 공간의 길이가 절대적이라는 , 즉 고정되어 있다는 믿음도 깨버렸다.
시간과 공간이 관측자의 운동속도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또한 물질이 에너지와 등가라고 하는 법칙도 발견했다. 이것이 유명한 E=mc2 이라는 식이다.


양자역학(量子力學, 영어: quantum mechanics, quantum physics, quantum theory)은

분자, 원자, 전자, 소립자와 미시적인 계의 현상을 다루는 즉, 작은 크기를 갖는 계의 현상을 연구하는 물리학의 분야이다.
현대 물리학의 기초인 양자역학은 컴퓨터의 주요 부품인 반도체의 원리를 설명해 주는 등 과학기술, 철학, 문학, 예술 등 다방면에 중요한 영향
20세기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론으로 평가된다.

19세기 중반까지의 실험은 뉴턴의 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루어진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의 아원자입자와 관련된 실험들의 결과는 고전역학으로 설명을 시도할 경우 모순이 발생하여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역학 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양자역학은 플랑크의 양자 가설을 계기로 하여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디랙 등에 의해 만들어진 전적으로 20세기에 이루어진 학문이다.
양자역학에서 플랑크 상수를 0으로 극한을 취하면 양자역학이 고전역학으로 수렴하는데, 이를 대응 원리라 한다.

양자역학은 모든 역학, 전자기학(일반 상대성 이론은 제외)을 포함하는 고전 이론을 일반화한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양자역학의 효과는 거시적으로는 관측이 어렵지만 고체의 성질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양자역학 개념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드하스-판알펜 효과는 양자역학을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원자 또는 그보다 작은 영역에서는 분명해진다.

이 용어를 처음 만든 사람은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으로, Quantenmechanik(퀀텐메카닉 그것이 그대로 영어로 번역된 뒤에, 일본에서 ‘量子力學(료오시리키가쿠)’라 새로 번역됐는데 이것이 한국에 그대로 들어와 ‘양자역학’이란 용어로 번역됐다.

양자역학이란 말을 이해하려면 ‘양자’와 ‘역학’을 각각 살펴보는 것이 좋다.
‘양자(量子)’로 번역된 영어의 quantum은 양을 의미하는 quantity에서 온 말로, 무엇인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학(力學)’은 말 그대로는 ‘힘의 학문’이지만, 실제로는 ‘이러저러한 힘을 받는 물체가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물리학의 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힘과 운동’의 이론이다.
이렇듯 양자역학이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이 이러저러한 힘을 받으면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제6장 21세기의 과학기술

20세기 후반기의 과학기술은 냉전이데올로기의 강한 영향 속에서 중앙집중화․거대화의 길을 걸었다.
이 시기에 세간의 조명을 가장 강하게 받았던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개발, 핵발전, 우주탐사, 거대 입자가속기, 핵융합 등의 과학기술은 모두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고, 국가의 통제하에 거대 규모로 운영되었으며, 군․산․학 복합체에 의해 추진되었다.
21세기에 과학기술의 성격이 국가 주도의 약화, 규모의 축소, 분산화, 민간 주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인간게놈프로젝트는 여러 나라의 협력연구였고 수십억 달러 이상의 연구비가 들어간 거대 프로젝트였지만, 연구 자체가 핵기술이나 소립자 연구의 경우와 달리 거대 연구기관 한 곳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크고작은 여러 연구기관에서 수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느정도는 분산적인 연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정보공학 : 네트워크형 기술의 특성은 바로 이와같이 막강한 정보통신망 조작기술을 지닌 미국조차도 분산적으로 수행되는 작은 싸이버 공격에 의해 커다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조망 불가능성과 중앙 컨트롤 포인트의 부재 때문에 교란은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전체적인 전복은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네트워크의 개별 구성분자는 자유롭고, 유연하며, 신속하게 변신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여서 만드는 네트워크는 해커 등의 공격으로 약간 흔들리기는 해도 전체가 흔들리는 일은 없다.
전체의 중심, 감시와 통제의 중심이 없는 씨스템에서는 공격을 통해 권력 전체를 빼앗을 중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와인버그(Steven Weinberg, 약력,전자기적 상호작용 연구로 노벨상 수상)나 펜로즈(Roger Penrose. 영국의 수리물리학자) 같은 물리학자는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합하는 대통일이론이 완성되면 진정한 의미의 과학은 더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으로 통하는 이 이론이 그들의 희망대로 지구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낸다면 과학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는 셈이다.

- 유전공학 : 게놈 해독이라는 바탕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유전자혁명은 그야말로 기술적인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게놈 해독 연구는 유전자나 유전자 조각의 증식, 절단, 절단부위 맞추어보기 작업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작업이 대부분 컴퓨터와 자동분석기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만 다를 뿐 기술자들이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공업생산품을 조립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 인지 신경과학: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인간의 행복과 슬픔, 즐거움과 아픔, 그리고 의식과 관련된 두뇌작용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한다.
두뇌 연구자들은 염색체 속의 DNA 염기서열을 자동화기계로 분석하듯이 두뇌 또한 영역을 잘게 나누어서 분석하여 지도를 만들고, 이 지도 속의 부분들이 어떤 정신작용과 연관되어 있는지를 밝혀내는 작업을 한다.
이 작업을 위해 필요한 것은 특정한 이론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뇌를 수많은 영역으로 나누어서 샅샅이 스캔할 수 있는 장치, 스캔된 정보를 코드화해서 저장하는 대용량 컴퓨터, 그것을 3차원 이미지화해서 판독하는 기술 등이다.
이러한 작업을 거쳐 두뇌의 작용이 해명된 후, 그 다음 단계로 두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작업이나 싸이보그적 인간을 만드는 것도 모두 기술의 영역에 속하지 여기에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지는 않다.
물론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물리․화학적 작용과 인간의 정신적․감정적 행위를 연결해주는 설명은 정신작용의 이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 설명이 두뇌에 관한 거대이론으로 정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생명공학 : 돼지의 심장을 인간화하는 작업도 진행중이었지만, 얼마 전 영국 과학자들은 그 작업을 일시 중단했다.
이들은 돼지의 심장을 인간에게 이식했을 때 거부반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약화시킴으로써 장기 이식용 심장을 대량으로 생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연구 책임자는 복제양 돌리를 만든 이언 윌머트 박사였는데, 그는 유전적으로 조작된 심장을 지닌 돼지를 만들어낸 다음 이것을 복제해서 ‘인간화’된 심장을 만들어내면, 이식용 심장을 기다리는 심장병환자 치료에 크게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꿈을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는데, 이유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돼지 바이러스가 돼지 심장과 함께 인체로 들어와서 생명에 위협을가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부록A 과학자들

아르키메데스 – 부력과 지렛대 원리
프톨레마이오스 – 천동설, 천구

코페르니쿠스-지동설
티코 브라헤,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 운동 법칙, 빛의 입자설 (vs. 빛의 파동설 ~ 호이겐스)

라브아지에 ~ 산소의 발견, 연소이론, 질량 보존의 법칙
※ 캐번디시의 수소 발견, 프리스틀리의 산소 발견, 러더 퍼드의 질소 발견
제너 ~ 종두법 (우두를 예방접종으로 천연두 예방) , 제너의 가설 : 우두에 걸린 사람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
파스퇴르 (1822~1895) 프랑스 화학자, 미생물학자 (부폐의 원인) ~ 콜레라, 탄저병 백신 제작
현미경은 1000년경부터 사용, 1590년대 얀센(네덜란드) 현대적 구조,
#레벤후크(1632~1723) 네덜란드 고배율의 현미경 제작
플레밍 (1881~1955) : 영국 세균학자, 페니실린 발견
괴리케(1602~1686) 독일 물리학자, 기전기 발명(마찰이나 정전기 유도를 이용하여 전기를 모으는 장치)

뒤페 (1698~1739) 프랑스 물리학자, 전기학의 기초를 개척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 : 미국 정치가, 저술가, 발명가, 과학자, 전기를 +와 –로 구분, + 전자가 이동(전류)로 오해, 번개가 전기적 현상임을 밝힘
쿨롱(1736~1806) 프랑스 물리학자, 전류, 쿨롱의 법칙
캐번디시 (~1810) 영국 물리학자, 수소 발견, 쿨롱의 법칙 먼저 발견하지만 늦게 알려짐
무센브루크 (1692~1762) : 네덜란드 실험물리학자, 라이덴 병 (최초의 축전기)
볼타(1745~1827) 이탈리아 물리학자, 볼타전지를 발명
갈바니 (1737~1798) 이탈리아 의학자, 물리학자, 동물전기(생명의 기)를 발견 (개구리)

돌턴(1766~1844) 영국 화학자, 물리학자, 색맹, 화학적 원자론 창시자, 배수비례의 법칙, 원소 기호 창시
프루스트(1752~1826) 프랑스 화학자, 일정성분비의 법칙
게이 뤼삭(1778`1850 ) 프랑스 물리학자, 화학자, 기체 반응의 법칙, 샤를의 법칙을 발표
아보가드로(1776~1856) 이탈리아 물리학자, 분자 개념으로 기체 반응의 법칙을 설명

보일(1627~1691) 영국의 화학자, 물리학자, 근대과학의 선구자, 기체의 압력과 부피는 반비례한다
샤를의 법칙 : 기체의 온도가 올라가면 팽창한다.
지파르(1825~1882) 프랑스 발명가, 최초의 여객용 비행기 제작

자석의 발견?? 아무도 모른다. (자철광 : 산화철 광물) 고대에서부터 사용
영국의 길버트(1544~1603); ‘자석에 관하여‘ ~ 자석에는 두 개의 N, S 극이 있다. 분리할 수 없다. 지구 자기를 발견
패러데이 (1791~1867) 영국의 화학자, 전자기 유도현상, 전자석
맥스웰 (1831~1879) 영국의 물리학자, 패러데이의 개념을 확장해 수학적으로 정리

찰스 다윈(1809~1882) 영국의 생물학자, 비글호 탐사 (남아메리카, 5년), 진화론의 기초, 종의 기원, 자연선택설
라마르크(1744~1829), 프랑스 박물학자, 용불용설 ~ 기린의 목

그레고르 멘델(1822~1884) 오스트리아 유전학자, 완두콩 교배 실험, 유전 법칙 (우성/열성), 분리의 법칙
란트슈타이너 (1868~1943) 오스트리아 병리학자, ABO식 혈액형, 수혈법 확립
드니 (1743~1704) 프랑스 의사, 최초로 동물의 피를 사람에게 수혈

뢴트겐(1845~1923) : 독일의 물리학자, 방사선의 존재를 확인, 방사선 : 물질을 통과하는 광선 (X-ray), 아내의 손 엑스레이 사진 -> 초대 노벨상 수상
마리 퀴리(1867~1934) : 프랑스 물리학자, 화학자, 방사성 원소 플로늄과 라듐 발견

아인슈타인(1879~1955) : 독일 이론물리학자, 수학과 물리학 만 공부, 상대성이론 (광속 불변의 법칙)
- 1905, 브라운 운동에 관하여, 광전효과, 특수 상대성 이론, 질량과 에너지 사이의 관계 ~ 논문 4년 발표
슈바르츠실트(1873~1916) 독일 천문학자, 블랙홀 개념을 제시
킵 손 (1940 ~ ) 웜홀을 통한 시간여행이 가능함을 제시

톰슨(1856~1940) 영국 물리학자, 전자의 존재를 증명, 음극선, 원자 모형
크룩스(1832~1919) 영국 물리학자, 방전관을 발명, X선 먼저 발견하지만 알지 못함.
밀리컨 (1868~1953) 미국 물리학자, 전자의 기본 전하량을 측정
러더퍼드(1871~1937) 영국 물리학자, 방사성의 법칙 연구, 원자 모형 실험, 원자 모형(양전하 중심 작게 뭉쳐있고-원자핵, 빈 공간을 음전하가 돌고 있다.)
닐스 보어(1885~1962) 덴마크 물리학자, 보어의 원자 모형(원자핵 주변을 도는 전자의 움직임을 궤도화 시킴)

훔볼트(1769~1859) 독일 자연과학자, 지리학자, 광물학, ‘남아메리카 여행기’
베게너(1880~1930) 독일 기상학자, 지구 물리학자, 대륙이동설 발표 (판게아 ~ 대륙)

플랑크(1858~1947) 독일 물리학자, 열역학의 체계화, 양자의 개념을 제시 (양자~ 불연속적 에너지)
- 광자 : 불연속적 에너지를 갖는 빛 알갱이를 입자로 파악했을 때의 명칭
광전효과 : 금속 등에 일정한 진동수 이상의 빛을 비추었을 때 물질의 표면에서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
드 브로이(1892~1987)) 프랑스 이론 물리학자, 양자론 연구, 빛의 이중성 : 빛은 파동성과 입자성 두 가지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하이젠베르크 (1901년 12월 5일~1976년 2월 1일)는 독일의 물리학자:
- 불확정성의 원리 : 확률로 인해 물질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할 수 없음,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모두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원리, 위치와 속력의 오차(불확정성)를 곱하면 항상 일정한 값보다 크다 -> 양자역학의 방정식이 등장

허블(1889~1953) 미국 천문학자, 우주 팽창론 이론 제시, 반사망원경, 허블의 법칙, 허블 상수 ( 안드로메다 은하 발견, 안드로메다 은하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발견)
빅뱅이론 : 우주배경복사, 빅크런치

채드윅(1891~1974) 영국 물리학자, 중성자 발견
페르미(1901~1954) 이탈리아 물리학자, 중성자에 의한 인공방사능 연구, 맨하튼 프로젝트

네덜란드 얀센의 현미경 발명 (1590) ~ 세포 연구가 활발해짐 (망원경의 원리, 여러가지 렌즈를 활용)
로버트 훅(1635~1703) 영국의 물리학자 , 세포 발견, 후크의 법칙 (뉴턴과 사이가 안 좋음, 만유인력 법칙 먼저 발견했다고 주장)
에이버리 (1877~1955) 미국 세균학자: 박테리아 연구를 통해 DNA가 유전물질임을 증명
크릭(1916~2004) 영국 분자생물학자 / 왓슨(1928 ~) 미국 분자생물학자 : DNA의 모델을 제안 ~이중 나선 구조


부록B 과학사 연표